밝고 유능하고 분주한, 자신에게 만족하는, 성공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여자는 스물여덟 살로부터 하루도 늙지 않은 것 같군.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몸시 애처로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 中-
제 옷자락을 쥐는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맥아리 없이 잘게 떨리는 것임에도 어쩐지 우악스럽다고 느껴졌다. 남의 손이 허락도 없이 제 몸에 닿는 건, 그다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는 네 시선을 붙잡았으니, 옷자락 정도는 내어줄 수 있었다. 정말 옷자락만을 잡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남는 거래였다.
고개를 돌려 네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옷자락에 걸린 무게가 무거웠다. 제가 흔들어 무너뜨리려 하는 세계의 무게와도 같았다. 제 오른손을 들어 저를 붙잡은 손 위에 살포시 얹었다. 마찬가지로 쉬이 뿌리칠 수 있는 미약한 손길이었다.
-너는 어떻게 되고 싶은데.
그리 말하곤 잠시 제 입을 닫았다.
제럴드는 갑자기 이 모든 상황에 위화감을 느꼈다. 저는 남에게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쓰레기 같은 인성에 비해 냉혈한은 못되어 누군가가 도움을 청할 때, 빠져나올 기회를 주기는 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 보통의 경우, 손을 뻗어 직접 꺼내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럴드가 어떤 인간인가? 이 이기적인 인간은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가능성에 제 불완전한 손을 내미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누군가의 실패는 그 누군가의 것을 남겨두는 편이 좋았다. 손이 잡힐 만큼 가까이 다가가면 제 약점이 드러나곤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네 세계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어진 걸까.
그리 길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래, 리벨리아 첸티움은 그냥 두기엔 너무 불쌍해 보였지. 바로 전까지는 숨을 쉬기 힘들어 보였고, 지금은 가만있어도 위태로워 보였다. 기댈 곳이 없어서 그리 싫어하던 자를 붙잡고 있는 꼴이 무슨 모래성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위태롭다거나, 방황한다거나... 아무튼, 그런 단어들과 거리가 멀었던 저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말을 곱게 포장해 위로를 건넬 성정은 되지 못했으니, 그저 제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계속 맴돌던 말을.
-너 진짜 머리 나쁜 거 알지?
멍청이.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옅은 장난기가 섞여 있어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중이었는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입가에는 평소에 보던 것보다 느슨한 미소가 걸려있었고 어깨에도 힘이 조금 빠져있는 게, 짐을 벗어 던진 홀가분한 사람 같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넌 그냥 바보에 겁쟁이야.
-당장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마. 너한테 당장 필요한 건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휴식이니까.
연애가 얼마나 체력소모가 심한데, 넌 그동안 피곤하지도 않았던 거야? 사람 좀 적당히 만나. 소수의 사람과 나누는 깊은 친교, 너한테는 그게 훨씬 잘 어울려. 그리 시답잖은 소리를 덧붙이며 가벼운 투로 두어 마디를 더했으나, 그 모든 게 딱히 장난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벼운 것부터 생각해. 넌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무엇을 싫은 척하고 있었는지. 또 이걸 좋아한다고 자신을 속이고 있던 건 없는지.
말 나온 김에 하나씩 불러봐. 난 레몬파이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너무 많아서 샐 수 없는데 일단 우리 형이 싫어. 망할 머저리 새끼... 넌 어때. 천천히 생각해봐. 상당히 단조로운 어투로 높낮이 없이 말을 쏟아낸 후, 고개를 슬 기울였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네 손 위에 겹쳐둔 오른손의 손가락을 까딱이는 건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 나면 네가 뭘 잘하는지도 떠올려봐.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 네 양팔을 교차시키듯 겹쳐서 어깨를 감싸게 했다. 그러곤 한 발짝 멀어져 네 모습을 살피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쩐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뒤에 손을 뻗어 너를 가볍게 끌어안아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던 건, 필시 너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아무튼 성격 한 번 참 이상하지...
-스스로 안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이런 것도 가르쳐줘야 하고... 리벨리아 너 완전 어린애네.
나 지금 보모가 된 기분이야. 알아? 몸을 떼어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머릿속엔 생각이 너무 많으니 새로운 것을 채우기 전에 비워낼 필요가 있었기에 부러 더 가볍게 굴었던 것도 있었으나, 솔직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사랑받길 좋아하고, 허구한 날 울고, 미숙하고, 그냥 5살 꼬마랑 비슷한 수준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미련해.
-...남겨지긴.
네 주변에 너 좋다고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뿐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고작 졸업으로 끝날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는 쪽도 분명 수두룩할 것이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겁에 질린 사람의 이성은 믿을 게 못 되었다. 같이 있으니 저도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잠시 실소했다. 여기서 우는 애 붙잡고 이러고 있는 거 보니 지능이 떨어진 건 한참 전인가 싶기도 했다.
-잘 들어 리벨리아. 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이거면 되지 않겠어?
제가 붙잡은 시선은 오롯이 저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네가 보고 있지 않던 모든 것들을 향했기에, 나에게는 책임이 있었다. 족쇄를 끊어냈으니 두 발로 서지 못하는 너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의무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하기 싫은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그것은 나의 책임이 되었다.
-내가 부쉈으니, 다시 세우는 것도 내가 도와줄게.
말했잖아, 그렇게까지 개자식은 아니라고.
그리 말하는 제럴드의 낯은 이미 평소와 다름없는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얼굴로, 평생 다시는 입 밖으로 낼 리 없는 말을 네게 건넸다. 하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리벨리아의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매워서 가능하면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사려야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눈 똑바로 떠. 난 네 앞에 서 있으니까.
설령 정말 보이지 않는대도 제 시야는 남들과 비교했을 때 아주 넓은 편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는 것들을 공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게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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